야기에우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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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기에우워 왕조는 폴란드 국왕 요가일라에서 유래한 왕조로,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폴란드, 리투아니아, 헝가리, 보헤미아 등 중앙 유럽의 여러 국가를 통치했다. 요가일라는 리투아니아 대공이었으나 크레보 연합을 통해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여 폴란드 국왕이 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야기에우워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왕조는 중세 후기 및 근세 시대에 걸쳐 동유럽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통해 '두 민족의 공화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야기에우워 왕조는 1572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사망으로 단절되었고, 이후 바사 왕가에 의해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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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에우워 왕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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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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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계 | 게디미나스 가 |
국가 |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 왕국 헝가리 왕국 보헤미아 왕국 |
칭호 |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헝가리 국왕 보헤미아 국왕 (및 선제후) 달마티아 국왕 라마 국왕 슬라보니아 국왕 크로아티아 국왕 실롱스크 공작 루테니아 공작 룩셈부르크 공작 스웨덴 왕비 |
창시자 |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야드비가 |
마지막 통치자 | 안나 야기엘론카 |
설립 연도 | 1386년 |
해체 | 1596년 |
명칭 | |
리투아니아어 | Jogailaičių dinastija (요가일라이čių 디나스티야) |
폴란드어 | dynastia jagiellońska (디나스티아 야기에우워ńska) |
폴란드어 (다른 표기) | dynastia Jagiellonów (디나스티아 야기에우워누프) Dom Jagiellonów (돔 야기에우워누프) |
리투아니아어 (다른 표기) | Jogailaičiai (요가일라이치아이) |
폴란드어 (다른 표기) | Jagiellonowie (야기에우워니에) |
라틴어 | Iagellonidae (이아겔로니다에) |
2. 명칭
이 명칭은 폴란드 국왕이 된 최초의 리투아니아 대공인 요가일라(야기에우워pl)에서 유래되었다. 폴란드어로는 이 왕조를 야기에우워pl라고 부르며, 부칭 형태는 야기에우워치크pl이다. 리투아니아어로는 요가일라이치아이lt, 벨라루스어로는 Яґайлавічыbe(), 헝가리어로는 야젤로hu, 체코어로는 야젤론치cs라고 부르며, 라틴어로는 야젤로la 또는 야젤론la이라고 한다. 어원적으로, 요가일라라는 이름은 리투아니아어 단어 jotilt(타다)와 gailuslt(강한, 강력한)에서 유래하여 "강한 기수"를 의미한다.
피아스트 왕조가 1370년 카지미에시 3세의 죽음으로 단절되자, 앙주 왕가의 러요시 1세가 폴란드 국왕 루드비크로 즉위했다. 1382년 루드비크가 죽은 후, 폴란드 왕위를 계승한 11세의 막내딸 야드비가는 1386년 리투아니아 대공 야기에워(요가일라)와 결혼했다. 야기에워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브와디스와프 2세로 칭하고 야기에우워 왕조를 세웠다. 1387년 리투아니아 전역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1399년 야드비가의 죽음으로 브와디스와프 2세의 단독 통치가 시작되었으며, 이후 35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 사이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기초가 다져졌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야기에우워 왕조의 창시자인 동시에 이교도였던 요가일라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세운 게디미나스 왕조의 후계자였다. 왕조는 양국을 1572년까지 지배했으며, 후기 중세 및 근세의 중·동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왕조 중 하나가 되었다.
3. 역사적 배경
야기에우워 왕조에서는 후에 벨라루스의 군주,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의 왕위에 오른 자들도 나타났지만, 1572년에 단절되었다.
3. 1. 야기에우워 왕조 이전
피아스트 왕조(약 962–1370)는 폴란드의 초기 지배 가문이었으며, 카지미르 3세 국왕의 사망으로 멸망했다. 초대 야기에우워 왕조의 직계 선조인 게디미니다스는 중세 리투아니아의 통치자였으며, 그의 칭호는 ''대공''이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주로 리투아니아인과 루테니아인이 거주했다.
야기에우워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인 요가일라는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시작했다. 크레보 연합의 결과로 그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 11세의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앙주 왕가 출신의 헝가리의 루이 1세 국왕의 딸)와 결혼했다. 이로써 그는 그녀의 공동 통치자로서 정실 군주인 폴란드 국왕이 되었고, 왕조를 창건했다. 앙주 왕가는 폴란드 국왕의 두 번째 왕조였고, 야기에우워 왕조는 세 번째 왕조였다.
3. 2. 야기에우워 왕조의 시작
피아스트 왕조(약 962–1370)는 폴란드의 초기 지배 가문이었으며, 카지미에시 3세 국왕의 사망으로 단절되었다. 초대 야기에우워 왕조의 직계 선조인 게디미니다스는 중세 리투아니아의 통치자였으며, 그들의 칭호는 ''대공''이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주로 리투아니아인과 루테니아인이 거주했다.
야기에우워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인 요가일라는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시작했다. 크레보 연합의 결과로 그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 11세의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앙주 왕가 출신의 헝가리의 루이 1세 국왕의 딸)와 결혼했다. 이로써 그는 그녀의 공동 통치자로서 정실 군주인 폴란드 국왕이 되었고, 왕조를 창건했다. 앙주 왕가는 폴란드 국왕의 두 번째 왕조였고, 야기에우워 왕조는 세 번째 왕조였다.
4. 폴란드 왕국
1386년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폴란드의 왕 브와디스와프 2세로 즉위하면서 야기에우워 왕조가 시작되었다. 1387년에는 리투아니아 전역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399년 야드비가가 사망하면서 브와디스와프 2세의 단독 통치가 시작되었고, 이후 35년 이상 지속되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기초가 다져졌다. 야기에우워 왕조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양국을 1572년까지 지배했으며, 후기 중세 및 근세의 중·동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왕조 중 하나였다.
1409년-1411년 대전쟁은 리투아니아가 튜튼 기사단 통치 하의 사모기티아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루스 군대는 그룬발트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을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이어진 말보르크 포위전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튜튼 기사단의 요새를 점령하지 못하고 그들의 국가를 제거하지 못한 것은 18, 19, 20세기에 폴란드에 심각한 역사적 결과를 초래했다. 1411년 토룬 평화 조약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사모기티아를 포함한 비교적 작은 영토 조정을 얻었다. 이후에도 협상과 평화 조약이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더 많은 군사 작전과 중재가 이어졌다. 해결되지 않은 중재 시도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있었다.
야기에우워 왕조는 자동적인 세습 승계 자격이 없었으며, 새로운 국왕은 귀족들의 합의를 통해 승인받아야 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늦은 나이에 아들 브와디스와프 3세를 얻었고, 귀족들은 국왕이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것을 보장한 후에야 브와디스와프 3세의 계승에 동의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바르나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카지미에시 4세가 폴란드 왕위를 계승했다.
카지미에시 4세 사후, 얀 올브라흐트가 왕위를 이었으나, 몰다비아 원정에 실패하고, 오스만 제국이 사주한 타타르족의 침입을 받았다. 얀 알베르트 사후에는 알렉산데르가 왕위에 올랐고, 그 뒤를 지그문트 1세가 이었다. 지그문트 1세는 보나 스포르차와 결혼하여 폴란드에 이탈리아의 문화를 전파하는데 기여했다.
지그문트 1세의 아들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는 리투아니아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루블린 연합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성립시켰다.
지그문트 1세와 지그문트 2세의 통치 기간은 폴란드 "황금기"로 불리며, 폴란드 르네상스 문화가 부흥했다. 이 시기 크라쿠프와 그단스크와 같은 도시의 엘리트들은 번영을 누렸고, 많은 폴란드인들이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크라쿠프 대학교를 비롯한 교육 기관들이 발전하면서 문맹률이 감소했다.
4. 1.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요가일라)
1385년,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유럽의 마지막 이교도 국가인 리투아니아 대공 야기에우워 사이에 크레보 연합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야기에우워는 리투아니아 기독교화를 위해 세례를 받고 (이후 야기에우워는 폴란드에서 그의 세례명인 브와디스와프, 그리고 그의 리투아니아 이름의 폴란드어 버전인 야기에우워로 알려지게 되었다.) 야드비가와 결혼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시작되었다. 이 연합은 튜튼 기사단과 모스크바 대공국의 위협에 맞서 두 나라를 강화했다. 이 연합은 서방 기독교와 동방 정교회 세계 사이의 문명적 분열의 반대편에 위치한 두 국가를 연결했다는 점에서 유럽에서 독특했다.[7]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아래 공동 국가를 창설하려는 의도였지만, 폴란드 지배층의 리투아니아 병합 아이디어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에는 영토 분쟁과 전쟁이 있었고, 리투아니아인들은 때때로 폴란드인에 대항하여 튜튼 기사단과 공모하기도 했다. 야기에우워 왕조의 지리적 결과와 왕들의 선호로 폴란드의 영토적 우선순위는 동쪽으로 재지향되는 과정이 가속화되었다.[8] 야기에우워 왕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감소했고, 이는 토지 귀족의 중앙 정부 및 국가 문제에서 역할이 커지는 것과 함께 나타났다.[9] 그러나 왕실 왕조는 폴란드의 정치에 안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야기에우워 시대는 종종 최대의 정치적 권력, 큰 번영, 그리고 후기에는 폴란드 문화의 황금기로 여겨진다.
후스 전쟁 (1420–1434) 동안 야기에우워, 비타우타스, 지그문트 코리부트는 1420년에 야기에우워에게 처음 제안된 체코 왕관과 관련된 정치적, 군사적 책략에 관여했다. 즈비그니에프 올레시니츠키는 후스파 체코 국가와의 연합에 반대하는 주요 인물이었다.[10]
야기에우워 왕조는 자동적인 세습 승계 자격이 없었으며, 새로운 국왕은 귀족들의 합의를 통해 승인받아야 했다. 브와디스와프 야기에우워는 마지막 부인 할샤니의 소피아와의 사이에서 늦은 나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1430년 귀족들은 국왕이 그들의 새로운 요구를 만족시킬 것을 보장한 후에야 미래의 브와디스와프 3세의 계승에 동의했다. 1434년 브와디스와프 야기에우워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 브와디스와프가 왕위에 올랐으며, 올레시니츠키 주교가 이끄는 왕실 평의회가 섭정 역할을 맡았다.

1438년 체코의 반합스부르크 반대 세력(주로 후스파)은 체코 왕관을 야기에우워의 막내 아들 카지미에시 4세에게 제안했다. 올레시니츠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서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두 차례의 실패한 폴란드 군사 원정이 보헤미아로 이어졌다.[10]
1430년 비타우타스가 사망한 후, 리투아니아는 내전과 폴란드와의 갈등에 휘말렸다. 1440년 브와디스와프 3세에 의해 리투아니아에 파견된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인들에 의해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포되었고, 리투아니아에 머물렀다.[10]
올레시니츠키는 폴란드와 헝가리의 연합이라는 장기적인 목표를 추구하며 다시 우위를 점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새로운 유럽 정복을 시작하여 헝가리를 위협했고, 헝가리는 강력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맹이 필요했다. 1440년 브와디스와프 3세는 헝가리 왕위를 차지했다. 줄리안 체사리니의 영향을 받은 젊은 국왕은 1443년과 1444년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헝가리 군대를 이끌었으나, 바르나 전투에서 체사리니와 함께 사망했다. 야기에우워가 생을 마감할 무렵부터 폴란드는 올레시니츠키가 이끄는 거물 과두 정치에 의해 실질적으로 통치되었다. 고위 관리들의 통치에 다양한 ''슐라흐타'' 집단이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들의 지도자 스피텍 멜슈틴스키는 1439년 무력 충돌 중에 사망했고, 이로 인해 올레시니츠키는 남은 후스파 동조자들을 폴란드에서 숙청하고 중대한 반대 없이 다른 목표를 추구할 수 있었다.
4. 1. 1. 튜튼 기사단과의 전쟁
1409년-1411년 대전쟁은 튜튼 기사단 통치하의 사모기티아 봉기로 시작되었는데,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루스 군대가 튜튼 기사단을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이어진 말보르크 포위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요새를 점령하고 튜튼 국가를 제거하지 못한 것은 18, 19, 20세기에 폴란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411년 토룬 평화 조약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사모기티아를 포함한 비교적 작은 영토를 얻었다. 이후에도 협상과 평화 조약이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더 많은 군사 작전과 중재가 이어졌다. 해결되지 않은 중재 시도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있었다.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는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와 그의 네 번째 부인 할샤니의 조피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카지미르가 태어날 당시 이미 65세였고, 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왕위를 이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라틴어도 배우지 못했다. 정치적인 지식은 부족했지만 국가의 외교와 경제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즈비그니에프 올레시니츠키 주교가 그의 멘토였지만, 브와디스와프의 죽음 이후 그가 성공적인 군주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그에게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지기스문트 케스트타이티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자리가 비게 되자, 트라카이의 보이보드 요나스 고스타우타스와 다른 리투아니아 유력자들은 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를 지지했다.[12] 그러나 많은 폴란드 귀족들은 열세 살의 소년이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 국왕의 대리 통치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는 리투아니아 유력자들에 의해 리투아니아로 초청되었고, 그의 형 브와디스와프 3세에 의해 그의 이름으로 통치하기 위해 리투아니아로 보내졌다.[13] 1440년 6월 29일 빌뉴스에 도착하여 리투아니아 영주 회의에 의해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출되었다.[13][14] 빌뉴스 주교는 폴란드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빌뉴스 대성당에 게디미나스 모자를 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의 머리에 씌웠다.[15][16] 이는 그로드노 연합 (1432년) 협정을 위반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종결시키는 것이었다.[15][16] 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는 스스로를 "자유로운 영주" (''pan – dominus'')로 강조했다.[16] 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가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포되었다는 소식이 폴란드에 전해지자, 리투아니아에 대한 군사적 위협까지 포함한 적대적인 반응이 나타났다.[17] 어린 리투아니아 대공이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대한 최고 통제권은 요나스 고스타우타스가 주재하는 리투아니아 영주 회의의 손에 있었고, 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는 임명된 궁정 관리들에 의해 리투아니아어와 리투아니아의 관습을 배웠다.[3][18][19][20]

1445년, 이미 리투아니아 대공이었던 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는 형 브와디스와프 3세가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사망하여 공석이 된 폴란드 왕위를 이어받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는 강경한 협상가였으며, 폴란드 귀족들의 선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조건 하에 폴란드 왕위를 계승했다.[21] 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는 3년간의 공위 기간 후 1447년 6월 25일 형 브와디스와프 3세를 이어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 1454년, 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는 엘리자베스 오스트리아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야기에우워 가문과 헝가리-보헤미아의 군주들 간의 유대가 강화되었고, 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내부 경쟁을 통해 신성 로마 황제와 대립하게 되었다. 폴란드 국왕이 된 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는 또한 리투아니아 과두 정치 세력이 그에게 강요했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447년 빌뉴스 특권에서 그는 리투아니아 귀족이 폴란드 ''슐라흐타''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는 올레시니츠키 추기경과 그의 그룹을 권력에서 제거할 수 있었고,[22] 대신 젊은 중산층 귀족 세력을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을 구축했다.
4. 2. 브와디스와프 3세
1409년-1411년 대전쟁은 리투아니아가 튜튼 기사단 통치 하의 사모기티아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루스 군대는 그룬발트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을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이어진 공세는 말보르크 포위전의 실패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튜튼 기사단의 요새를 점령하지 못하고 튜튼 국가를 제거하지 못한 것은 18, 19, 20세기에 폴란드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1411년 토룬 평화 조약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사모기티아를 포함한 비교적 작은 영토 조정을 얻었다. 이후에도 협상과 평화 협정이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더 많은 군사 작전과 중재가 있었다. 해결되지 않은 중재 시도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있었다.후스 전쟁 (1420–1434) 동안 야기에우워, 비타우타스, 지그문트 코리부트는 1420년에 야기에우워에게 처음 제안된 체코 왕관과 관련된 정치적, 군사적 책략에 관여했다. 즈비그니에프 올레시니츠키는 후스파 체코 국가와의 연합에 반대하는 주요 인물이었다.[10]
4. 2. 1. 폴란드-헝가리 연합
야기에우워 왕조는 자동적인 세습 승계 자격이 없었으며, 새로운 국왕은 귀족들의 합의를 통해 승인받아야 했다. 브와디스와프 야기에우워는 마지막 부인 할샤니의 소피아와의 사이에서 늦은 나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1430년 귀족들은 국왕이 그들의 새로운 요구를 만족시킬 것을 보장한 후에야 미래의 브와디스와프 3세의 계승에 동의했다. 1434년 늙은 군주는 사망했고 그의 어린 아들 브와디스와프가 왕위에 올랐다. 올레시니츠키 주교가 이끄는 왕실 평의회가 섭정 역할을 맡았다. 1438년 체코의 반합스부르크 반대 세력(주로 후스파)은 체코 왕관을 야기에우워의 막내 아들 카지미에시 4세에게 제안했다. 올레시니츠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서 받아들여진 이 아이디어는 두 차례의 실패한 폴란드 군사 원정을 보헤미아로 이끌었다.[10]
비타우타스가 1430년에 사망한 후 리투아니아는 내전과 폴란드와의 갈등에 휘말렸다. 1440년 브와디스와프 3세에 의해 그곳에 파견된 소년 카지미에시는 놀랍게도 리투아니아인들에 의해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포되었고, 그는 리투아니아에 머물렀다.[10]
올레시니츠키는 다시 우위를 점했고 폴란드와 헝가리의 연합이라는 그의 장기적인 목표를 추구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새로운 유럽 정복을 시작하여 헝가리를 위협했고, 헝가리는 강력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맹이 필요했다. 1440년 브와디스와프 3세는 헝가리 왕위를 차지했다. 줄리안 체사리니의 영향을 받은 젊은 국왕은 1443년과 1444년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헝가리 군대를 이끌었다. 체사리니처럼 브와디스와프 3세는 바르나 전투에서 사망했다. 야기에우워가 생을 마감할 무렵부터 폴란드는 올레시니츠키가 이끄는 거물 과두 정치에 의해 실질적으로 통치되었다. 고위 관리들의 통치에 다양한 ''슐라흐타'' 집단이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들의 지도자 스피텍 멜슈틴스키는 1439년 무력 충돌 중에 사망했고, 이로 인해 올레시니츠키는 남은 후스파 동조자들을 폴란드에서 숙청하고 중대한 반대 없이 다른 목표를 추구할 수 있었다.
4. 3. 카지미에시 4세
1370년 카지미에시 3세가 사망하면서 피아스트 왕조가 단절되자, 헝가리 앙주 왕조의 헝가리 국왕러요시 1세가 폴란드 국왕 루드비크로 즉위했다. 1382년 루드비크가 사망한 후, 그의 막내딸 야드비가가 11세의 나이로 폴란드 왕위를 계승, 1386년 리투아니아 대공 야기에워(요가일라)와 결혼했다. 야기에워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브와디스와프 2세로 칭하며 야기에우워 왕조를 세웠다. 1387년 리투아니아 전역이 기독교로 개종했다.1399년 야드비가가 사망하면서 브와디스와프 2세의 단독 통치가 시작, 35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기초가 다져졌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야기에우워 왕조의 창시자였으며, 이교도였던 요가일라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세운 게디미나스 왕조의 후계자였다. 야기에우워 왕조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양국을 1572년까지 지배했으며, 후기 중세 및 근세의 중·동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왕조 중 하나였다. 야기에우워 왕조에서는 벨라루스의 군주,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의 왕위에 오른 자들도 나타났지만, 1572년에 단절되었다.
4. 3. 1. 13년 전쟁 (1454–66)
1409년-1411년 대전쟁은 리투아니아가 튜튼 기사단 통치 하에 있던 사모기티아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루스 군대가 튜튼 기사단을 크게 무찌른 그룬발트 전투가 포함되었다. 이후 이어진 공격은 말보르크를 효과적으로 포위하지 못하면서 그 기세를 잃었다. 튜튼 기사단의 요새를 점령하고 그들의 국가를 제거하지 못한 것은 18, 19, 20세기에 폴란드에 심각한 역사적 결과를 초래했다. 토룬 평화 조약(1411)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사모기티아를 포함한 비교적 작은 영토를 얻게 되었다. 이후에도 협상과 평화 협정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더 많은 군사 작전과 중재가 이루어졌다. 해결되지 않은 중재 시도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루어졌다.
4. 3. 2. 오스만 제국 및 타타르족과의 전쟁
야기에우워 왕조의 남부 및 동부 외곽은 15세기 말부터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위협받았다. 1387년 몰다비아 공작 페트루 1세가 르비우에서 야기에우워에게 경의를 표하며 몰다비아와 폴란드의 관계가 시작되었고, 폴란드는 흑해 항구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1485년 카지미르 국왕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해상 항구가 점령된 후 몰다비아로 원정을 떠났다. 튀르크의 지배를 받는 크림 타타르는 1482년과 1487년에 동부 지역을 습격했고, 카지미르의 아들인 얀 올브라흐트 국왕과 대립했다.폴란드는 1487~1491년 골든 호드의 잔당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자슬라블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루블린까지 침략했다. 1497년 얀 1세 알베르트 국왕은 튀르크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슈테판 대왕의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1498년, 1499년, 1500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사주한 타타르족의 파괴적인 습격이 더 발생했다. 얀 알베르트가 시도한 외교적 평화 노력은 1503년에 마무리되었고, 이는 영토적 타협과 불안정한 휴전으로 이어졌다.
4. 4. 지그문트 1세와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
알렉산데르 대공은 얀 1세 알베르트가 죽은 후 1501년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24] 1506년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모두에서 지그문트 1세(Zygmunt I Stary|지그문트 1세 스타리pl)가 계승했는데, 이는 정치적 현실이 두 국가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기 때문이다.[25] 그 전에는 지그문트 1세는 형인 보헤미아의 블라디슬라프 2세의 권한으로 실롱스크 공작이었지만, 그 이전의 다른 야기에우워 왕가 통치자들처럼 폴란드 왕관이 실롱스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알렉산데르 1세 국왕의 죽음 이후 지그문트 1세는 빌뉴스에 도착하여 1506년 9월 13일 리투아니아 공작 회의에 의해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공동 폴란드-리투아니아 군주 선출을 포함하는 멜니크 연합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25] 1506년 12월 8일 피오트르쿠프에서 열린 폴란드 원로원 회의에서 지그문트 1세는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25] 그는 1507년 1월 20일 크라쿠프에 도착하여 4일 후 대주교 안제이 보리셰프스키에 의해 바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1518년 지그문트 1세는 젊고 강인한 정신을 가진 이탈리아 공주인 보나 스포르차 다라곤와 결혼했다.[25] 보나가 국왕과 마그나트에 미치는 영향력, 국왕의 정치적 지위, 재정 상황을 강화하려는 그녀의 노력, 특히 1529년 미성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강제적인 왕실 선거와 1530년 그의 조기 대관식을 포함하여 그녀의 개인적이고 왕조적인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취한 조치들은 '슈라흐타' 활동가들 사이의 불만을 증가시켰다.[26]
지그문트 2세는 즉위 초부터 대가문들의 권력을 축소하기 시작한 귀족들과 충돌했다. 귀족들이 왕에게 적대감을 갖는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비밀리에 맺은 두 번째 결혼, 즉 리투아니아 칼뱅주의자인 바르바라 라지비우, 예지 라지비우의 딸과의 결혼이었다.[32] 이 비밀 결혼은 그의 어머니 보나와 왕관의 유력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32] 1548년에 아버지 지그문트 1세가 죽은 후 야기에우워 왕조 시대 폴란드 역사에서 폴란드 왕국을 이어받은 지그문트 2세는 이러한 반대를 극복하고 1550년에 바르바라를 대관시켰다. 몇 달 후, 새 여왕은 사망했다.[32][27] 지그문트 2세는 바르바라의 장례 행렬을 크라쿠프에서 빌뉴스로 따라가며 도시들을 직접 걸어서 이동했다.[33] 아들로부터 소외된 보나는 1556년 이탈리아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26]
지그문트 2세는 끈기와 인내심을 갖추고 있었으며, 외교적 수완도 뛰어났다. 그는 폴란드 세임의 본질을 철저히 이해했으며, 오스트리아 대사들과 교황 사절들은 그가 국가를 신중하게 통제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세임에서 많은 돈을 얻어냈고, 마조비아 공국 귀족의 소박한 회색 코트를 입고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그는 친 오스트리아 제국 성향이었지만, 독일인을 불신하는 국민들을 설득했으며, 투르크와의 심각한 갈등을 피했다.
지그문트 2세는 가톨릭 교회와 종교 개혁 사이에서 20년간 중재 역할을 했다. 리보니아 전쟁의 쇠약해지는 시작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리투아니아 귀족의 폴란드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원하는 열망으로 이어졌고, 이는 무자녀인 지그문트 2세에게 루블린 연합을 가져왔는데, 이 연합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동등한 권리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합했다. 즉, "두 민족의 공화국"(Rzeczpospolita Obojga Narodów|두 민족의 공화국pl)이었다.[27][34][35] 또한 독일어를 사용하는 왕실 프로이센과 프로이센 도시들도 포함되었다.
4. 4. 1. 르부프의 반란 (닭 전쟁)
폴란드 귀족(슐라흐타)들은 총동원령을 위해 르부프 근처에 모여 몰다비아에 대한 군사 작전을 요구했다. 그러나 귀족의 하위 및 중위 계층은 국왕에게 위험한 개혁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반란, 또는 준법적 반란을 일으켰다. 귀족들은 국왕에게 36가지 요구를 제시했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요구는 다음과 같다: 보나 스포르차 왕비의 추가적인 토지 매입 중단, 귀족의 십일조 면제, 재무부 확장보다는 정리, 귀족의 특권 확인 및 확대, 통행료 인상 또는 귀족의 통행료 면제, ''incompatibilitas''(동일인이 겸직할 수 없는 특정 직책의 양립 불가)에 관한 법률 채택, 대부분의 주요 지역 직책에 지역 귀족만을 임명하도록 요구하는 법률 시행 및 국왕의 영구적인 고문단 창설.[1] 시위대는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 왕자의 "나쁜 교육"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보나 왕비의 역할도 비판했다.[1]4. 4. 2.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
보나 스포르차와 리투아니아 영주 평의회 간의 합의에 따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는 1529년 빌뉴스에서 9세의 나이로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포되었다.[27][28] 처음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리투아니아 왕위를 야기에우워 왕조의 부계 상속 재산으로 그의 후손에게 역사적 상속 시스템을 남기려 했기 때문이다.[27][28] 1544년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독립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28] 1547년 왕실을 크라쿠프에서 빌뉴스로 옮겼고, 이는 이 지역의 지적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29][30] 1548년 아버지 지그문트 1세가 시작한 빌뉴스의 리투아니아 대공의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재건을 완료했다.[27][31] 빌뉴스에 두 개의 분리되고 호화로운 리투아니아어와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왕실을 유지했다.[6]
지그문트 2세는 즉위 초부터 이미 대가문들의 권력을 축소하기 시작한 귀족들과 충돌했다. 귀족들이 왕에게 적대감을 갖는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비밀리에 맺은 두 번째 결혼, 즉 아름답다고 알려진 리투아니아 칼뱅주의자인 바르바라 라지비우, 예지 라지비우의 딸과의 결혼이었다.[32] 이 비밀 결혼은 그의 어머니 보나와 왕관의 유력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32] 1548년에 아버지 지그문트 1세가 죽은 후 야기에우워 왕조 시대 폴란드 역사에서 폴란드 왕국을 이어받은 지그문트 2세는 이러한 반대를 극복하고 1550년에 바르바라를 대관시켰다. 몇 달 후, 새 여왕은 사망했다.[32][27] 지그문트 2세는 바르바라의 장례 행렬을 크라쿠프에서 빌뉴스로 따라가며 도시들을 직접 걸어서 이동했다.[33] 아들로부터 소외된 보나는 1556년 이탈리아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26]
지그문트 2세는 모든 야기에우워 왕조의 특징으로 보이는 끈기와 인내심을 매우 높은 수준으로 갖추고 있었으며, 이러한 자질에 솜씨와 외교적 수완을 더했다. 다른 폴란드 왕들 중 폴란드 세임의 본질을 그렇게 철저히 이해한 사람은 없는 듯하다. 오스트리아 대사들과 교황 사절 모두 그가 국가를 얼마나 신중하게 통제했는지 증언한다. 그들은 그가 미리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보다 더 많은 돈을 세임에서 얻어냈고, 그의 세임 중 하나에서 예상치 못하게 마조비아 공국 귀족의 소박한 회색 코트를 입고 나타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는 친 오스트리아 제국 성향이었지만, 이러한 점에서도 종종 독일인을 불신하는 국민들을 설득해냈다. 그는 강력한 투르크와의 심각한 갈등을 피했다.
지그문트 2세는 가톨릭 교회와 종교 개혁의 사이에서 20년간 중재 역할을 했다. 리보니아 전쟁의 성공적이지 못하고 쇠약해지는 시작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리투아니아 귀족의 폴란드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원하는 열망으로 이어졌고, 이는 무자녀인 지그문트 2세에게 아마도 가장 획기적인 기념비인 루블린 연합을 가져왔는데, 이 연합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동등한 권리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합했다. 즉, "두 민족의 공화국"(Rzeczpospolita Obojga Narodówpl, Abiejų Tautų Respublikalt).[27][34][35] 또한 독일어를 사용하는 왕실 프로이센과 프로이센 도시들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업적은 지그문트 2세 없이는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4. 4. 3. 알베르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 보나 스포르차는 1527년 임신 5개월째에 곰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조산으로 둘째 아들을 출산했다. 알베르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출생 후 몇 시간 만에 사망하여 니에포워미체 성 예배당에 묻혔다.[36][37]
4. 4. 4. 폴란드 문화의 황금기
폴란드 "황금기"는 지그문트 1세와 지그문트 2세 (마지막 두 야기에우워 왕)의 통치 기간, 또는 일반적으로 16세기로, 폴란드 르네상스 문화의 부흥과 가장 빈번하게 동일시된다. 이러한 문화적 번영은 크라쿠프와 그단스크와 같은 중심지의 토지 귀족과 도시 부르주아 모두의 엘리트의 번영에 물질적 기반을 두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영감은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에서 왔으며, 이는 지그문트 1세와 보나 스포르차의 결혼으로 어느 정도 가속화되었다. 많은 폴란드인들이 유학하고 문화를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다. 이탈리아 방식을 모방하는 것이 매우 유행이 되면서(두 왕의 왕실 궁정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리더십과 모범을 제공했다), 많은 이탈리아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폴란드로 와서, 일부는 정착하여 수년 동안 그곳에서 일했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선구적인 폴란드 인문주의자들이 고대 문화의 예비 동화를 달성한 반면, 그 다음 세대는 토착 요소의 개발에 더 큰 강조점을 둘 수 있었고, 사회적 다양성으로 인해 국가 통합 과정을 발전시켰다. 크라쿠프 대학교와 지그문트 2세는 장서가 풍부한 도서관을 소유했으며, 귀족 궁정, 학교 및 도시 주민들의 가정에서 더 작은 컬렉션이 점점 더 흔해졌다. 16세기 말까지 거의 모든 교구가 학교를 운영하면서 문맹률이 감소했다.
5. 헝가리 및 보헤미아 왕국
1515년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야기에우워 왕조의 형제들인 보헤미아 및 헝가리의 블라디슬라우스 2세와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의 지그문트 1세 사이에 왕조 계승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으로 황제는 폴란드의 적대국인 튜턴 기사단과 러시아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지만, 1519년 막시밀리안의 후계자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선출된 후 지그문트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38]
중앙 유럽에서 야기에우워 왕조와 합스부르크 왕가 간의 경쟁은 결국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유리하게 해결되었다. 마지막 야기에우워 군주들의 국가를 약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었다. 헝가리는 1521년 술레이만 1세가 벨그라드 요새를 점령한 후 취약성이 크게 증가했다. 술레이만 1세는 폴란드가 헝가리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1524년에 타타르-투르크군을 동원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남동부를 습격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패배했으며, 블라디슬라우스 2세의 아들인 젊은 헝가리의 러요시 2세가 전사했다. 그 후 내분과 외부의 개입을 거쳐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분할되었다.[38]
5. 1. 헝가리의 블라디슬라우스 2세
1515년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야기에우워 왕조 형제들인 보헤미아 및 헝가리의 블라디슬라우스 2세와 폴란드의 지그문트 1세 사이에 왕조 계승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으로 황제는 폴란드의 적대국인 튜턴 기사단 및 러시아 국가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38]중앙 유럽에서 야기에우워 왕조와 합스부르크 왕가 간의 경쟁은 결국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유리하게 끝났다. 마지막 야기에우워 군주들의 국가를 약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었다. 1521년 술레이만 1세가 벨그라드 요새를 점령하면서 헝가리는 매우 취약해졌다. 술레이만 1세는 폴란드가 헝가리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1524년에 타타르-투르크군을 동원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남동부를 습격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패배했으며, 블라디슬라우스 2세의 아들인 헝가리의 러요시 2세가 전사했다. 그 후 내분과 외부의 개입을 거쳐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분할되었다.[38]
5. 1. 1. 보헤미아 왕
라디슬라우스는 1456년 3월 1일 폴란드의 국왕 카지미에시 4세와 리투아니아 대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야기에우워 왕조의 수장이었고,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의 아들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알베르트, 독일의 왕이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의 딸이었다. 그는 조부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국왕 블라디슬라프 야기에워, 외삼촌인 보헤미아의 국왕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 그리고 부친의 삼촌이자 헝가리의 이전 국왕인 블라디슬라프 3세의 이름을 따서 세례를 받았다.[38]이전 국왕 이르지 포데브라트의 미망인은 그를 보헤미아 왕위로 제안했으며, 1471년 8월 22일 보헤미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르지 폰 포데브라트 사망 이후 보헤미아 왕위를 둘러싼 갈등 시기(보헤미아-헝가리 전쟁 참조)에 라디슬라우스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프라하에 도착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5세였고, 조언자들에게 상당 부분 지배를 받았다. 왕위 계승 분쟁은 1479년 올로모우츠 조약에서 해결되었는데, 이 조약으로 라디슬라우스와 마차시 코르비누스 모두 "보헤미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라디슬라우스는 보헤미아 본토를, 마차시는 모라비아, 실레시아, 그리고 두 개의 루사티아를 통치했다. 조약은 또한 마차시가 사망할 경우 라디슬라우스가 보헤미아 영토 전체에 대해 400000 굴덴을 지불하도록 규정했지만, 마차시 사후 라디슬라우스가 헝가리의 왕이 되면서 이 지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8]
5. 1. 2. 헝가리 왕
1515년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야기에우워 왕조 형제들인 보헤미아 및 헝가리의 블라디슬라우스 2세와 폴란드의 지그문트 1세 사이에 왕조 계승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황제가 폴란드의 적대국인 튜턴 기사단 및 러시아 국가에 대한 지원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38]중앙 유럽에서 야기에우워 왕조와 합스부르크 왕가 간의 경쟁은 결국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유리하게 해결되었다. 마지막 야기에우워 군주의 군주국을 손상시키거나 약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었다. 1521년 술레이만 1세가 벨그라드 요새를 점령한 후 헝가리는 취약성이 크게 증가했다. 술레이만 1세는 폴란드가 헝가리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1524년에 타타르-투르크군을 동원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남동부를 습격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패배했으며, 블라디슬라우스 2세의 아들인 헝가리의 러요시 2세가 전사했다. 그 후 내분과 외부의 개입을 거쳐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분할되었다.[38]
1490년, 마차시 1세 코르비누스 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헝가리에는 큰 혼란이 닥쳤다. 그의 사생아 아들 야노시 코르빈은 헝가리 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퇴각을 강요당한 후 그들은 블라디슬라프를 헝가리로 불렀다. 블라디슬라프는 1490년 9월 18일에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38]
블라디슬라프는 즉시 헝가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그의 궁정과 모든 자녀들은 부다 궁전에서 태어났다. 헝가리 귀족들이 통치했고 그의 이름으로 많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으며, 그의 군주로서의 역할은 곧 부차적인 위치로 넘어갔다. 서폴러이 이슈트반, 대주교 바코츠 터마시, 세체니 죄르지는 투르크와의 전쟁 계획을 계속 추진했으며, 마차시의 죽음 이후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진 왕국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유쾌한 사람이었지만, 세 번째 아내가 죽은 후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거의 모든 공식적인 문제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그는 거의 모든 요청에 Benela ()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블라디슬라우스 베네"(폴란드어: ''Władysław Dobrze'', 헝가리어: ''Dobzse László'', 체코어: ''král Dobře'')라는 별명을 얻었다.[38]
5. 2. 헝가리의 루이 2세

루이 2세는 블라디슬라프 2세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푸아의 앤의 아들이었다. 1515년 빈 회의에서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손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와 결혼했다. 그의 여동생 안나는 카를 5세를 대신하여 총독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와 결혼했다.
술레이만 1세 즉위 후, 술탄은 헝가리가 지불해야 했던 연례 조공을 징수하기 위해 루이 2세에게 대사를 보냈으나, 루이는 조공 지불을 거부하고 오스만 제국 대사를 처형하였다. 루이는 교황령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포함한 다른 기독교 국가들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믿었으나, 이는 헝가리의 몰락을 재촉했다.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왕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술레이만은 로도스 포위전 계획을 연기하고 베오그라드로 원정을 떠났다. 루이는 군대를 제대로 모으지 못했고, 다른 유럽 국가들의 지원을 얻지 못했다. 베오그라드와 세르비아의 많은 전략적 요새들이 오스만 제국에 점령되면서, 부다를 포함한 헝가리는 터키의 추가 정복에 취약해졌다.

1526년 술레이만은 헝가리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 두 번째 원정을 떠났다. 루이는 중세 군대, 부족한 화기, 구식 전술로 야전에서 오스만 군대를 막으려다가 전술적 실수를 범했다. 1526년 8월 29일,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오스만 기병대에 포위되었고, 중앙에서는 헝가리 중기병과 보병이 격퇴되었으며, 특히 잘 배치된 오스만 대포와 잘 무장하고 훈련된 예니체리 총병에게 많은 사상자를 냈다.
헝가리 왕립군의 거의 전체가 전장에서 파괴되었다. 퇴각하는 동안 스무 살의 젊은 왕은 늪에서 사망했다.[38]
5. 2. 1. 야기에우워 왕조의 단절
1515년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야기에우워 왕조의 형제들인 보헤미아 및 헝가리의 블라디슬라우스 2세와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의 지그문트 1세 사이에 왕조 계승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으로 황제는 폴란드의 적대국인 튜턴 기사단과 러시아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지만, 1519년 막시밀리안의 후계자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선출된 후 지그문트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38]합스부르크 왕가와의 경쟁은 결국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유리하게 끝났다. 마지막 야기에우워 군주의 국가를 약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었다. 1521년 술레이만 1세가 베오그라드 요새를 점령한 후 헝가리는 취약성이 크게 증가했다. 술레이만 1세는 폴란드가 헝가리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1524년에 타타르-투르크 군을 동원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남동부를 습격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패배했으며, 블라디슬라우스 2세의 아들인 헝가리의 러요시 2세가 전사했다. 이후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루이 2세는 블라디슬라프 2세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푸아의 앤의 아들이었다. 1515년, 루이 2세는 제1차 빈 회의에서 규정된 대로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손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와 결혼했다. 그의 여동생 안나는 카를 5세를 대신하여 총독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와 결혼했으며, 후에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되었다.
술레이만 1세가 즉위한 후, 술탄은 헝가리가 지불해야 했던 연례 조공을 징수하기 위해 루이 2세에게 대사를 보냈으나, 루이는 연례 조공 지불을 거부하고 오스만 제국 대사를 처형하였다. 루이는 교황령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를 포함한 다른 기독교 국가들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믿었다. 이 사건은 헝가리의 몰락을 재촉했다.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왕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술레이만은 로도스 포위 공격 계획을 연기하고 베오그라드로 원정을 떠났다. 루이는 군대를 제대로 모으지 못했고, 다른 유럽 국가들의 지원을 얻지 못했다. 베오그라드와 세르비아의 많은 전략적 요새들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되면서, 부다를 포함한 헝가리는 터키의 추가 정복에 취약해졌다.
1526년 술레이만은 헝가리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 두 번째 원정을 떠났다. 루이는 중세 군대, 부족한 화기, 구식 전술로 야전에서 오스만 군대를 막으려다가 전술적 실수를 범했다. 1526년 8월 29일, 루이는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를 상대로 군대를 이끌었다. 헝가리군은 오스만 기병대에 포위되었고, 중앙에서는 헝가리 중기병과 보병이 격퇴되었으며, 특히 잘 배치된 오스만 대포와 잘 무장하고 훈련된 예니체리 총병에게 많은 사상자를 냈다.
헝가리 왕립군의 거의 전체가 전장에서 파괴되었다. 퇴각하는 동안 스무 살의 젊은 왕은 늪에서 사망했다. 루이에게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국의 후계자로 선출되었지만, 헝가리 왕위는 터키가 정복한 왕국 지역을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통치했던 서포여이 야노시에 의해 경쟁되었다.
6. 야기에우워 왕가의 리투아니아 대공
지그문트 1세와 보나 스포르차, 리투아니아 영주 평의회 간의 합의에 따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는 1529년 빌뉴스에서 9세의 나이로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포되었다.[27][28] 처음에는 지그문트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리투아니아 왕위를 야기에우워 왕조의 부계 상속 재산으로 그의 후손에게 역사적 상속 시스템을 남기려 했기 때문이다.[27][28] 1544년, 지그문트 2세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독립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28] 1547년에는 왕실을 크라쿠프에서 빌뉴스로 옮겼는데, 이는 이 지역의 지적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29][30] 1548년, 지그문트 2세는 아버지 지그문트 1세가 시작한 빌뉴스의 리투아니아 대공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재건을 완료했다.[27][31] 그는 빌뉴스에 리투아니아어와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두 개의 분리되고 호화로운 왕실을 유지했다.[6]
지그문트 2세는 즉위 초부터 귀족들과 충돌했는데, 이는 대가문들의 권력을 축소하려는 그의 정책 때문이었다. 귀족들이 왕에게 적대감을 갖는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비밀리에 맺은 두 번째 결혼, 즉 리투아니아 칼뱅주의자인 바르바라 라지비우(예지 라지비우의 딸)와의 결혼이었다.[32] 이 비밀 결혼은 그의 어머니 보나와 왕관의 유력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32] 1548년 아버지 지그문트 1세가 사망한 후, 야기에우워 왕조 시대 폴란드 역사에서 폴란드 왕국을 이어받은 지그문트 2세는 이러한 반대를 극복하고 1550년에 바르바라를 대관시켰다. 그러나 몇 달 후, 새 여왕은 사망했다.[32][27] 지그문트 2세는 바르바라의 장례 행렬을 크라쿠프에서 빌뉴스로 따라가며 도시들을 직접 걸어서 이동했다.[33] 아들로부터 소외된 보나는 1556년 이탈리아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26]
지그문트 2세는 끈기와 인내심, 솜씨와 외교적 수완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폴란드 세임의 본질을 철저히 이해했으며, 오스트리아 대사들과 교황 사절들은 그가 국가를 얼마나 신중하게 통제했는지 증언했다. 그는 세임에서 아버지보다 더 많은 돈을 얻어냈고, 마조비아 공국 귀족의 소박한 회색 코트를 입고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그는 친 오스트리아 제국 성향이었지만, 독일인을 불신하는 국민들을 설득했다. 그는 투르크와의 심각한 갈등을 피했다.
지그문트 2세는 가톨릭 교회와 종교 개혁 사이에서 20년간 중재 역할을 했다. 리보니아 전쟁의 시작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리투아니아 귀족이 폴란드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원하게 만들었고, 이는 무자녀인 지그문트 2세에게 루블린 연합을 가져왔다. 이 연합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동등한 권리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합했으며, "두 민족의 공화국"(, )을 만들었다.[27][34][35] 또한 독일어를 사용하는 왕실 프로이센과 프로이센 도시들도 포함되었다.
초상화 | 이름 | 출생 | 사망 | 재위 | 배우자 | 비고 |
---|---|---|---|---|---|---|
90px |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Władysław II Jagiełło) | 1362년경 | 1434년 | 1377–1381, 1382–1434 | 야드비가 (폴란드 여왕)(Jadwiga of Poland) | 리투아니아 야기에우워 왕조의 시조이며, 게디미나스(Gediminids) 리투아니아 왕조에서 파생되었다. 1377년부터 리투아니아 대공이었으며, 1386년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 (폴란드 여왕)(Jadwiga of Poland)와 결혼하여 가톨릭 세례를 받은 후 1386년에야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 야드비가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39] |
90px | 브와디스와프 3세 야기에우워(Władysław III Jagiellon) | 1424년 | 1444년 | 1434–1444 | 없음 | 호로드워 연합(Union of Horodło)의 리투아니아 대공국 최고 공작(Supremus Dux)[40][41]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Władysław II Jagiełło)와 소피아 할샤니(Sophia of Halshany)의 장남이었다.[42] |
90px |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에우워(Casimir IV Jagiellon) | 1427년 | 1492년 | 1440–1492 | 엘리자베스 오스트리아(Elisabeth of Austria) | 1440년부터 리투아니아 대공이었으며, 1447년에야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43]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Władysław II Jagiełło)와 소피아 할샤니(Sophia of Halshany)의 차남이다.[42] |
90px | 알렉산데르 1세 야기에우워(Alexander I Jagiellon) | 1461년 | 1506년 | 1492–1506 | 엘레나 모스크바(Helena of Moscow) | 1492년부터 리투아니아 대공이었으며, 1501년에야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44] |
90px | 지그문트 1세(Sigismund I the Old)[45] | 1467년 | 1548년 | 1506–1548 | 바르바라 자폴랴(Barbara Zápolya) | 1506년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즉위할 때 부여한 특권에 따르면, 대공으로 선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최고 공작(Supremus Dux)으로도 선출되었다.[46] |
90px |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Sigismund II Augustus) | 1520년 | 1572년 | 1544–1572 | 엘리자베스 오스트리아(Elisabeth of Austria) | 1544년부터 리투아니아 대공이었으며, 1548년에야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는 리투아니아의 바르바라 라지비우였으며, 그의 죽음은 그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47][28] |
야기에우워 왕가는 대공 비타우타스(Vytautas the Great), 시지스문드 케스투타이티스(Sigismund Kęstutaitis) (케스투티스(Kęstutis) 대공의 자녀)의 사망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 칭호를 주로 상속받았으며, 게디미나스(Gediminas) 대공의 직계 조상이었다.[48]
7. 야기에우워 왕가의 폴란드 국왕
초상화 | 이름 | 출생 | 사망 | 재위 기간 | 배우자 |
---|---|---|---|---|---|
-- |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 1362년경 | 1434년 | 1386년–1434년 | 야드비가 안나 폰 질리 엘리자베스 필리차 소피아 윌크 |
-- | 브와디스와프 3세 | 1424년 | 1444년 | 1434년–1444년 (폴란드) 1440년–1444년 (헝가리) | 없음 |
-- | 카지미에시 4세 | 1427년 | 1492년 | 1447년–1492년 | 엘리자베스 |
-- | 얀 1세 올브라흐트 | 1459년 | 1501년 | 1492년–1501년 | 없음 |
-- | 알렉산데르 1세 | 1461년 | 1506년 | 1501년–1506년 | 헬레나 |
-- | 지그문트 1세 | 1467년 | 1548년 | 1507년–1548년 | 바르바라 자폴랴 보나 스포르차 |
-- |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 1520년 | 1572년 | 1530년/1548년–1572년 | 엘리자베스 바르바라 라지비우 캐서린 |
1386년 리투아니아 대공 야기에워(요가일라)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브와디스와프 2세로 칭하며 야기에우워 왕조를 세웠다.[3] 야기에우워 왕조는 1572년까지 폴란드를 지배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 얀 1세, 안나를 제외한 폴란드 국왕은 리투아니아 대공을 겸임했다.
8. 야기에우워 왕가의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국왕
블라디슬라우스 야기에우워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국(1490년 이후)에 대한 왕조적 지배권을 확립했다. 헝가리 왕으로 선출되어 즉위한 후, 블라디슬라우스는 두 나라를 모두 통치하고 자녀를 낳고 키운 헝가리로 궁정을 옮겼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루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 왕가는 남성 혈통이 단절되었다.[2]
초상 | 이름 | 출생 | 사망 | 재위 | 배우자 |
---|---|---|---|---|---|
-- |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블라디슬라 2세 | 1456년 | 1516년 | 1471년–1516년 보헤미아 1490년–1516년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 브란덴부르크의 바르바라 나폴리의 베아트리체 푸아-칸달의 앤 |
-- |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러요시 2세 | 1506년 | 1526년 | 1516년–1526년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
9. 야기에우워 왕조의 다른 구성원
초상화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직위 및 칭호 |
---|---|---|---|---|---|
![]() | 폴란드의 야드비가 야기에우워 | 1457년 | 1502년 | 게오르크, 바이에른 공작 | 바이에른-란츠후트 공작부인 |
-- | 성 카시미르 | 1458년 | 1484년 | 없음 |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수호 성인 |
-- | 폴란드의 조피아 야기에우워 | 1464년 | 1512년 | 프리드리히 1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부인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 부인 |
-- | 프리데릭 야기에우워치크 | 1468년 | 1503년 | 없음 | 그니에즈노 대주교 크라쿠프 주교 폴란드 수석 주교 |
폴란드의 안나 야기에우워 | 1476년 | 1503년 | 보기슬라프 10세, 포메라니아 공작 | 포메라니아 공작 부인 | |
-- | 폴란드의 바르바라 야기에우워 | 1478년 | 1534년 | 게오르크, 작센 공작 | 작센 공작 부인 마이센 변경백 부인 |
-- |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안나 | 1503년 | 1547년 | 페르디난트 1세, 신성 로마 황제 | 로마인의 여왕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여왕 |
-- | 폴란드의 야드비가 야기에우워 | 1513년 | 1573년 | 요아힘 2세 헥토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부인 |
-- | 폴란드의 이사벨라 야기에우워 | 1519년 | 1559년 | 야노슈 자폴리야 | 동헝가리 여왕 |
-- | 폴란드의 조피아 야기에우워 | 1522년 | 1575년 | 헨리 5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부인 브리엔 청구권 |
-- | 폴란드의 안나 야기에우워 | 1523년 | 1596년 | 스테판 바토리 | 폴란드 국왕 폴란드 여왕 브리엔 청구권 |
-- | 폴란드의 카타르지나 야기에우론카 | 1526년 | 1583년 | 요한 3세 스웨덴 | 스웨덴 여왕 |
10. 야기에우워 왕조 가계도
스우프스크 공작
(요가일라)
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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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
(레오폴트계)
(알브레히트계)
H,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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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 |F| 지그문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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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 스테판 바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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